2024년 4월 26일(금)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SBS스페셜' 꼬꼬무 "유전무죄 무전유죄"…지강헌 사건, 그 날의 진짜 이야기 공개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0.06.15 00:57 수정 2020.06.15 10:13 조회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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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새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지강헌은 흉악한 인질범이었을까?

14일에 방송된 SBS 스페셜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부'가 공개됐다.

이날 방송에서는 방송인 장성규, 개그우먼 장도연, 영화감독 장항준이 이야기꾼으로 등장해 각각 김지혁 아나운서, 개그맨 김여운, 개그우먼 송은이에게 그날의 이야기에 대해 들려주었다.

지난 1988년 10월 16일, 88년 서울 올림픽의 흥분이 채가시지 않은 그때 TV를 통해 생중계된 한 사건이 있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에 일어난 북가좌동의 인질극 바로 '지강헌 사건'

당시 권총을 든 지강헌은 겁에 질린 여성을 인질로 붙잡고 경찰을 향해 요구사항을 이야기했다. 그의 요구사항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려달라는 것.

지강헌은 인광술, 한의철, 강 OO씨와 함께 인질극을 벌였고 당시 지강헌의 나이는 35세, 나머지는 모두 20대 초반의 남성들이었다.

인질극이 펼쳐지던 현장 주변에는 경찰들과 취재진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지강헌은 "나는 시인. 나는 미래를 보고 과거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흔히들 알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 바로 지강헌.

그의 이야기는 왜 다시 회자되는 것일까. 우리는 인질극이 벌어지지 9일 전으로 돌아갔다.

10월 8일 토요일 중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던 죄수 호송 버스. 그 버스에는 미결수 25명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안성 부근을 지날 때 재소자 한 명이 교도관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도관이 죄수에게 소변통을 건네는 순간 재소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난투극을 벌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죄수들에게 점령당한 호송 차량. 이때 죄수들은 교도관들과 옷을 바꿔 입었고 이들 중 13명은 안전한 감금을 선택했고 12명은 재소자 카드를 다 찢어버리고 권총과 실탄을 챙겨 탈출했다.

이에 전국은 초 비상 상태. 이 중 2명은 당일 검거, 3명은 룸살롱에서 호스티스까지 불러 놀다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그리고 당시 룸살롱 주인은 600만 원의 현상금까지 받았다.

아직 남은 7명의 죄수, 그들이 선택한 것은 인질 숙박. 그들은 서울시 곳곳의 가정집에 들어가 머무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들이 가정집을 선택한 것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2번의 인질 숙박 이후 이들의 행동은 과감해졌다. 이들은 백주대낮에 대학병원의 주차장에 침입해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인질로 삼아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작진은 32년 만에 실제 인질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직접 들었다. 당시 35세였던 인질은 그날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내게 다가와서 칼을 겨누는 순간 느껴지는 거지. 이 친구들이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탈주범들과 2박 3일 동안의 계약 동거를 택했다.

제약회사 직원이었던 인질은 수면제를 떠올리고 인질범들에게 먹일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와 달랐고 인질은 곧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을 인질로 삼은 지강헌 때문에 다른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인질은 탈주범들과 함께 당일 저녁 함께 술도 마셨다고 말했다. 최초의 국산 럼주 캡틴 큐를 함께 마신 이들. 그리고 이때 탈주범들은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없이 힘들게 살았으며 이 곳 저곳에서 이어진 홀대와 냉대로 힘들었던 날들을 고백했다.

지강헌을 인질극을 벌이던 당시 "내가 살아오면서 죄를 많이 지었지만 나에게도 예쁜 모습도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지강헌, 그는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반복된 냉대와 차별로 상처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시인이 꿈이었던 지강헌은 스스로에 대해 "난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낭만적인 염세주의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탈주를 한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의 비리를 모두 파헤치고 죽겠다"라며 "연희궁으로 가려다 경비가 심해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연희궁은 전두환의 사가. 탈주범은 왜 전두환을 만나려고 했을까.

지강헌의 죄목은 7차례 걸쳐서 현금, 승용차 등 약 556만 원을 절도한 것. 이에 그가 받은 형량은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보호감호란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징역 후 감호소에서 머물게 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징역과 다를 것 없는 것이었다. 지강헌의 경우 17년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

보호감호 제도를 만든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두환. 그는 80년 국가보위위원회를 신설하고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영장도 없이 6만 명을 검거, 그중 4만여 명을 삼청교육대로 보내고 이 중 수많은 이들이 훈련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 청송에 청송 보호감호소를 건립해 상습 범죄자들을 장기 구금할 수 있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이에 자전거 한 대를 훔쳐도 징역 3년에 보호감호 10년, 고총 9천 원어치 절도로 징역 1년 6개월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이중처벌, 과잉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2005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에 자유로운 이가 있었다. 당시 리틀 전두환도 불렸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그는 막강한 권력으로 횡령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몇백억 원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재판부에서 인정한 횡력액만 76억 원. 이로 전경환이 받은 형량은 고작 7년형. 그리고 그는 3년 정도 살다가 석방이 되었다.

형평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상황. 이에 이런 말이 탄생했던 것이다. 계엄 상황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서 지강헌과 3명은 도주했던 4번째 인질 숙박을 이어갔다.

당시 TV에서 탈주범들의 뉴스를 보고 있던 22세의 여대생은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는 탈주범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던 4번째 집의 인질. 그는 "70이 넘은 아버지가 밥은 먹었냐. 밥부터 차려라 라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추장찌개와 이것저것을 준비했고 정말 맛있게 식사를 하더라"라고 말했다.

식사 후 마음이 누그러진 탈주범들은 집주인이 신발을 벗으라는 말에 순순히 신발도 벗고 바닥을 닦으라고 걸레까지 건넸다고.

안정을 찾은 탈주범들은 여대생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들은 "어떻게 죽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냐. 옥상에서 떨어지는 게 멋있냐. 총에 맞아 죽는 게 멋있냐"라고 물었던 것. 이들은 이미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터.

그리고 여대생이었던 인질은 탈주범들을 순순히 나가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성경을 읽어줄 것을 결정했다. 이에 지강헌은 어느 순간 여대생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여대생에게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겠냐"라고 물었던 것. 이에 당시 여대생이었던 인질은 "그래서 뭐라고 기도를 해드릴까요 했더니, 내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하겠다고 하면서 둘이 같이 앉아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니까 엄청나게 울더라. 저도 울고 그분도 울고 같이 울었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어디에서도 밝혀진 적 없는 지강헌과 인질의 이야기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모든 이들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탈주범들은 네 번째 집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북가좌동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집주인의 신고로 테러 특공대들을 마주했다. 또한 탈주범의 가족들까지 북가좌동으로 향했다.

담 밖에서 보면 무시 무시한 인질범, 하지만 집 안에서 보인 탈주범들의 모습은 달랐다. 인질범들은 총을 겨누면서도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없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라고 인질들에게 거듭 사과했던 것.

당시 지강헌은 승합차를 대기하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차가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질범 강 씨가 인질을 붙잡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려던 강 씨를 향해 총을 쏜 지강헌. 그는 "내가 너 살린다. 조용하고 내 말 들어. 내 의견 받아들여라"라며 가장 어렸던 강 씨를 달랬다.

그리고 그 순간 집 안에서 들려온 총성 두 발. 이는 안광술과 한의철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쏜 총성이었다. 마지막으로 홀로 남은 지강헌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려달라고 했고, 그는 노래를 들으며 머리에 총을 겨눴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를 집어 들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 순간 경찰 특공대가 들이닥쳐 지강헌에게 총 2발을 발사했고 그는 병원에 옮겨진 4시간 후 사망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 살아남은 탈주범 강 씨는 경찰에 검거되었다.

북가좌동 인질극의 유일한 생존자 강 씨. 선고 공판에서 징역이 15년형이 구형되었지만 7년형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인질들이 그를 위해 써준 탄원서 때문이었다.

인질이 그를 위해 보낸 탄원서 내용은 이러했다.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그날은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다. 이들에게서 나쁜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이들은 "잘 먹었습니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졌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자기들이 떠나면 곧 신고를 하라며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 삼아 세상의 좋은 등대지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 탄원서를 본 이들도 눈물을 흘렸다. 송은이는 "왜 울컥했는지는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5번의 인질극, 하지만 단 한 명도 희생당하거나 다치지 않았던 인질. 이에 장항준은 "이들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이들의 일생이 가련하다. 밥은 먹었냐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 그들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인질들의 그런 태도들이 그다음 집의 재앙을 막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외 유명 경제지에는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한국에서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다는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

어찌 보면 범죄자들이 합리화하려고 했던 말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 말이 회자되는 이유는 여전히 이 말이 삶 속에 있고 2020년에도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전 결혼 무전 비혼, 유전 취업 무전 실업, 유전면제 무전입대 등,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결을 같이 하는 말들이 우리의 일상 속에 여전히 있는 것.

그날의 이야기가 끝나고 송은이는 "흉악범이 저지른 인질극이라는 기억이었는데, 이 이야기의 깊이를 알고 나면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이 사건의 주인공들이 영웅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여운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라 유죄는 유죄, 무죄는 무죄였으면 좋겠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그리고 장성규는 "32년 후에 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근현대사 역사책에서만 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그날'의 이야기를 세 명의 이야기꾼을 통해 쉽게 전달해주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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