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일)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흥행 돌풍 '서울의 봄', 알고 보면 더 재밌다…흥미진진한 비화

김지혜 기자 작성 2023.12.02 10:05 수정 2023.12.08 14:23 조회 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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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한 편의 영화에서 오프닝과 엔딩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오프닝과 엔딩은 관객이 이야기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관객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빨아 당기는 건 감독과 배우의 몫이다.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향을 정한다면 배우는 그 안에서 연기라는 춤으로 관객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영화는 이 모든 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 탄생한다.

여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아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0.26으로 시작해 12.12로 결말을 맺은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이다. 사건의 시작과 끝은 교과서에서도 배웠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관심도 크게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1979년 12월 12일, 사건의 주무대인 육군참모총장의 한남동 공관 근처에 살았던 김성수 감독은 44년 후 목격자에서 스토리텔러가 됐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그는 단순히 역사를 재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울의 봄'은 익히 알려진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사건이 벌어진 9시간의 타임라인에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결이라는 큰 틀을 짰다. 여기에 캐릭터를 파고들며 김성수가 가장 잘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보여줬다.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 전두광(황정민)과 이태신(정우성)의 대립을 액션 영화의 스케일과 박진감으로 묘사한다. 전방의 공수부대를 서울로 진입시켜 권력을 장악하려는 전두광의 반란군과 남은 병력을 끌어모아 반란군을 막아내려는 이태신의 진압군이 서울 광화문에서 마주하기까지의 스펙터클은 이 영화의 백미다. 빠른 컷 편집(김상범 편집감독)과 분할화면, 조명의 명암대비(이성환 조명감독) 등을 통해 관객이 사건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게끔 한 영화적 테크닉도 훌륭하다.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가 이토록 뜨겁고 역동적인 장르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재미가 없으면 그냥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무려 44년 전의 사건이에요. 요즘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옛날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죠. 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스토리텔러잖아요. 이야기를 재밌게 전달해야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관객이 영화를 통해 '와, 내가 이 상황에 들어와서 현장을 목도하고 있구나'라는 긴장된 흥분상태를 유지시켜줘야 한다는 게 저나 배우들, 스태프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날 밤, 9시간에 걸쳐 벌어진 쿠데타 끝에 반란의 주역들은 국가 권력을 찬탈했고 민주화를 역행했다. 그러나 사건은 다른 결말을 낼 수도 있었다. '서울의 봄'은 일촉즉발의 현장에 영화적 상상력을 부여해 어떤 사람들은 역사의 퇴보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김성수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건, 현재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동시대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봄'이 가진 영화적 힘은 박제된 역사를 끄집어내 새로운 평가를 하게 하는 데 있다. 어떤 관객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거울을 보기도 한다. 이 영화를 향한 관객의 열광에는 분노, 울분의 감정이 크게 포함돼 있다. 사법부는 역사의 죄인에게 제대로 된 심판을 하지 못했지만 영화라는 대중 예술은 그날의 사건을, 그 사람들을 재심하는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김성수 감독은 '비트', '태양은 없다'로 1990년대와 2000년대까지 충무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렸다. 최근 '아수라'를 만들며 녹슬지 않은 연출력과 감각을 선보인 김성수 감독은 '서울의 봄'으로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의 봄'은 김성수 감독에게도 조금은 이례적인 영화다.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실화 기반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으며 근·현대사를 조명한 영화를 연출한 적도 없다. 김성수 감독은 한 차례 고사 끝에 이 영화의 연출직을 수락하며 "운명처럼 여겨졌다"라고 말했다.

김성수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서울의 봄'의 뒷이야기를 공개한다. "역사가 스포일러"라지만, 영화를 만든 이들이 전하는 제작 비화는 알고 보면 더 재밌다.

남산

◆ 10.26 다룬 '남산의 부장들'보다 먼저 기획됐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상업영화다. 물론 과거에도 전두환 시대를 다룬 영화들은 있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 운동을 다룬 '1987'(2017)이 있었고,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휴가'(2007), '택시 운전사'(2017)가 있었다. 또한 '그 사람' 암살 시도를 그린 '26년'(2012)과 '헌트'(2022), '그'의 태동을 알린 '남산의 부장들'(2020)도 만들어졌다. '서울의 봄'은 전두환을 주변 인물이거나 '보이지 않은 힘'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핵심 인물로 등장시킨 첫 번째 극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남산의 부장들'을 만든 영화사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제작했다. 이로 인해 하이브의 근·현대사 시리즈도 조명받고 있다. 1979년 10.26 사건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이 시간적으로는 조금 더 앞선 이야기이지만 먼저 기획된 건 '서울의 봄'이었다.

영화를 제작한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김원국 대표는 "개인적으로 근,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 12.12 군사반란은 내가 학생 때 벌어진 일이고 아버지 친구 중 하나회 회원도 계셔서 남다르게 다가왔다. 하룻밤, 단 9시간 만에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급작스럽게 바뀌지 않았나. 매우 중요한 사건이고, 영화의 소재로서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남산의 부장들'보다 앞선 10년 전부터 이 시나리오를 개발했다"라고 밝혔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김성수 감독은 배우 캐릭터를 연출하는 데 탁월할 역량을 가진 연출자다. 특히 전작 '아수라'에서는 수많은 악인들이 한데 엉키는 아사리판을 매력적으로 연출하며 극찬을 받았다. 김원국 대표는 주저 없이 김성수 감독에게 '서울의 봄' 연출을 제안했다.

시나리오를 받은 김성수 감독은 거절 의사를 전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초고부터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었다. 뛰어난 작가들이 그날의 이야기를 굉장히 단단하게 썼더라. 다만 역사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김성수 감독은 고사 이후에도 이 이야기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약 10개월 후, 김원국 대표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 시나리오의 방향성을 새롭게 제시했다.

'서울의 봄'은 홍인표, 홍원찬, 이영종, 김성수 총 4인이 각본을 썼다. 김성수 감독이 연출하기로 결정하고 각본에 참여하기 전까지 약 20고의 수정본이 있었다. 현재의 이야기틀이 완성된 건 김성수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고 난 뒤다. 김성수 감독이 각본에 있어 가장 많이 힘을 준 캐릭터는 이태신이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이 영화가 승리의 기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역사에 있는 인물이지만 좀 더 영화적인 캐릭터를 부여해 그들이 승리하는 순간에 "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자격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관객들이 그 사람을 통해 호흡할 수 있고, 단순히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영화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실존 인물에서 이름도 바꾸고, 상황도 바꾸고, 인물이 움직이는 동선도 바꿨다"

김성수 감독의 오른팔인 이모개 촬영감독, '편집 장인'이라 불리는 김상범 편집감독과 의기투합한 '서울의 봄' 첫 번째 편집본은 약 2시간 40분이 나왔다. 여기에서 최종 편집을 거쳐 현재의 2시간 20분 버전의 극장판이 완성됐다. 영화가 개봉 10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하자 확장판에 대한 요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제작사 측은 "현재로서는 계획에 없다"고 전했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악의 끝판왕을 보여드리겠다"... 황정민의 결기·정우성의 고민

'서울의 봄'은 전두광의 영화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놀라운 결과물이다. 이태신이라는 인물이 반대 축에서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 약 60명의 군인 캐릭터들이 각각 전두광과 이태신의 진영에서 명령과 회유, 겁박의 가해자이자 분열과 변심의 대상자로 훌륭한 연기 앙상블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전두광 캐릭터의 존재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황정민의 전두광이 있었기에 '서울의 봄'이 지금과 같은 완성도로 완성될 수 있었다. 김성수 감독 역시 "황정민이 캐스팅을 수락하면서 영화 '서울의 봄'이 시작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위대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 캐스팅을 수락하기 전에 적잖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만났을 때는 아무 말 없이 '할게요' 한마디만 하더라. 배우의 결행이었다. 그래서 난 '정민 씨가 이 역할을 해주면, 정말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있다. 믿어 달라'라고 했다. 그러니 '알겠어요. 감독님이 영화 잘 만들어 주시겠다고 했으니까 저는 '악의 끝판왕'을 보여주겠습니다'라고 하더라. 나에 대한 격려였으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모든 리스크를 안고 할 테니까 너 영화 잘 만들어'라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정민 씨가 출연을 수락했을 때 심지에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김성수와 황정민, 연출과 연기에 있어서는 치열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영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울의 봄'의 명장면인 화장실 신 역시 두 사람의 양보 없는 토론과 논의 끝에 탄생했다. '전두광이 모든 일이 끝난 뒤 화장실에서 가서 마침내 웃는다'라는 건 시나리오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제는 이 장면을 어떻게 그리는 가였다.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감독님, (이 장면) 이거 어떻게 (연기)하죠?"라고 하더라. 정민 씨는 절대 그런 말을 하는 배우가 아니다. 후반부에 찍을 거니까 편하게 아무렇게나 하라고 했다. 그날이 왔다. 약간 벽에 부딪힌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화장실 바닥에 앉아서 세 시간 동안 회의를 했다. 감독과 배우가 의견 일치를 못 해서 그러고 있으면 스태프들은 불안해하기 마련인데 '두 명의 전두광이 앉아서 깊은 대화를 하고 있다'며 사진을 막 찍더라.(김성수 감독은 스태프가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두 광(光)이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앉아 심각하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선 장면에서 전두광은 광화문에서 이태신에게 "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자격이 없어"라는 말을 들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반란군들이 기뻐하는 와중에 '내가 이겼는데 왜 초라해지지?'라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러다 화장실에 도착해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해야 해?, 나는 승리자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괴한 웃음을 보여준 거다. 그렇게 해도 관객들은 그 사람을 승리자로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일로 전두광은 그 전의 전두광과는 다른 인물이 됐다. 탐욕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삼켜진, 욕망덩어리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 인간은 이후에 더한 짓도 하는 인간이 됐을 거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악당의 탄생 장면을 묘사하고 싶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서울의 봄'의 또 다른 축은 이태신이다. 김성수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다. 이 역할 역시 정우성이 1순위였다.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까지 무려 네 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우성은 김성수의 페르소나기도 했다.

배우의 이미지가 캐릭터에 투영돼 보이지 않은 시너지를 내는 경우가 있다. 정우성은 완벽한 타입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촬영을 마친 영화 '헌트'의 김정도와 캐릭터가 겹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

"'헌트'의 김정도와 '서울의 봄' 이태신 모두 동일 인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영화가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며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고는 하지만 외피적인 대립구도를 관객이 비슷하게 여기실 것 같았다. 그러면 관객이 이태신이라는 캐릭터를 보는 데 벽이 세워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런 우려를 감독님께도 말씀드렸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정우성이 마음을 돌린 것은 김성수 감독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럼, 작품을 엎겠습니다."

이태신은 군인의 소신을 외롭게 지키는 인물이다. 정우성은 캐릭터를 연구하며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김성수 감독은 흰머리가 날 정도로 고심하고 있는 정우성에게 UN 난민기구 친선대사 때 찍은 인터뷰 영상을 보내 "참고하라"라고 팁을 줬다.

"영상을 보내고선 '이게 이태신이야' 하셨어요. 난민 이슈 때 제주 상황이 펼쳐지면서 엄청난 공격을 받았어요. 영상에서 제가 의연하고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보신 것 같아요. 그때의 제 태도와 자세가 극 중 이태신의 태도와 자세였으면 좋다는 의미였죠."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전두광과 노태건, 불을 끄다"... 영화적 상상력이 돋보였던 그 장면의 연출법

'서울의 봄'에는 김성수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전두광이 연희동 자택에서 군 장성들, 후배들과 쿠데타를 모의하는 장면이다. 전두광은 처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하나회 회원들에게 알린다. 한 군 장성이 "그건 쿠데타야"라고 우려하자, 전두광은 "이왕이면 혁명이라는 멋진 단어를 쓰십시오!"라며 방 안의 불을 끈다. 그리고 노태건(박해준)이 말을 이어받아 "대통령 재가만 받으면 문제없습니다"라며 나머지 불 하나를 끈다.

어둠 속에서 전두광과 노태건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겁박과 회유를 오가는 설득전을 벌인다. 전두환이 생전 자택에서 하나회 모임을 자주 가졌다는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탄생했다. 이 시퀀스는 '불을 끈다'는 설정 하나로 그날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효과를 냈다. 김성수 감독은 이 장면의 의미를 연출자가 직접 설명하는 것을 민망해 했다. 그러나 기자가 의견을 전하며 소통을 바라자, 상세한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 '서울의 봄' 예고편

"이 시퀀스는 원래 9분짜리였다. 신이 길기도 했고 변화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는 전두광과 노태건이 미리 계획한 자리였고, 두 사람이 각각의 역할에 맞게 시나리오를 써 놓은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불을 끄는 행위는 익명성을 부여하는 설정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서로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자기 생각만 할 수 있으니까.

그때 전두광이 상석과 하석으로 나눠 하나회 회원들을 휘어 잡는 말을 한다. 먼저 후배들에게 서울대 나올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육사에 와서 선배들에 치여 제대로 진급하지 못하는 현실을 자극했고, 선배들에겐 곧 퇴역해야 할 아슬아슬한 위치임을 상기시키며 내면의 욕망을 끄집어내는 말을 던진다. 노태건은 이때 한 선배 장성의 무릎을 의도적으로 건드려서 이 쿠데타에 동조하는 말을 처음으로 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두 번째는 전두광이 민성배(유성주) 육군참모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신사협정'을 제안하는 장면이다. 전두광은 "왜 전화했냐"는 참모차장의 말에 말없이 구둣발 소리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게 하며 대답을 지연한다. 그리곤 9공수를 물리면 1공수도 물리겠다는 협정을 제안한다. 구둣발 소리와 대답 지연의 의미는 뭘까.

"그들을 군인이고 상대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략과 술수는 쓰는 게 당연하다. 육본 쪽에서는 전두광이 직접 전화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을 것이다. 전두광은 이때 상대에게 대화의 타이밍을 뺏어 불안하게 하고, 용건을 궁금하게 하기 위해 대답을 지연한다. 주변의 자기 동료들도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을 짓는다. 전두광은 참모차장이 만만한 인물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어서 자기식으로 농락을 하면서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한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9공수가 서울에 진입했다고 하자 한영구(안내상) 중장이 "명분도 없이 시작해서 일을 망쳤다"라고 전두광을 다그친다. 이때 전두광은 '명분'이라는 단어에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이후 등장한 것이 전화 장면이다. 상대가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명분을 준 뒤 술수를 부린 것이다."

서울

◆ '그때 그 사람들' 박제 사진, 못 볼 뻔했다

'서울의 봄'은 엔딩을 위해 달려온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12월 12일 밤 9시간의 쿠데타는 하나회 일당에겐 '승리'로 기록됐고, 다음날 그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나회의 가장 유명한 단체 사진을 재현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연출과 자막 사용을 두고 제작진 내부의 의견이 갈린 것으로 알려졌다. 너무 직접적인 표현이라 반대도 적잖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작자 김원국 대표와 김성수 감독은 이 사진으로 영화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뚝심을 밀고 나갔다. 박제 사진을 엔딩으로 선택한 김성수 감독의 생각은 이랬다.

"12. 12 사건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이 사진이 가장 먼저 뜬다. 이 사진을 접하지 않으면 그 사건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 사진 장면을 넣었다. 그때 그 사람들에겐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록'일 것이다. 그 사람들이 영광스러워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지금의 관객들은 어떨까. 그 사진을 통해 내가 어릴 때 동네에서 사건을 목격한 뒤 수수께끼처럼 실제 사건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처럼, 영화와는 다른 실제 사건을 들여다보며 이 이야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고 싶었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이 사진의 기능은 '조명'이 아닌 '박제'다. 영화는 군사 반란의 주역들의 얼굴을 일일이 클로즈업하며 그들이 받은 '떡고물'을 나열한다. 역사의 승리자라고 자부했던 그들이 현재의 관객에게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조명받고 있는 건 비극의 역사 앞에서 스러진 군인들의 '그 후' 이야기다. 이태신 캐릭터의 모델인 장태완 사령관의 사연은 특히 많은 이들의 울분을 자아내고 있다.

장태완 사령관은 12.12 이후 서빙고분실에서 약 45일간 고문을 받고 강제 예편됐다. 6개월간 가택연금도 당했다. 아들의 처지에 충격받은 그의 부친은 식음을 전폐한 후 술에 의지하다 19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에 수석 입학했던 아들이 할아버지 산소 근처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장태완 사령관은 민주화 이후 1994년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6년 문민정부 시절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책임이 있는 전두환, 노태우 재판에 증인으로 나섰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열기도 했다. 2010년 7월 26일 79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2년 뒤 그의 아내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 캐릭터의 실제 모델인 정병주 사령관 역시 12.12 이후 강제 예편됐다. 그 후에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1989년 3월 서울 교외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경찰이 밝힌 사인은 자살이었으나 의문점이 많은 죽음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정해인

오진호(정해인) 소령의 모델인 김오랑 소령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정병주 사령관을 홀로 지키다가 반란군의 실탄을 맞고 사망했다. 특히 김오랑 소령과 위, 아랫집에 살며 친했던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군인들의 총격을 받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안구질환을 앓고 있던 부인 백영옥 씨는 남편의 죽음 이후 실명했다. 백영옥 씨는 정병주 사령관과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했다. 국가배상 소송도 준비했다. 당시 노무현 의원과 장기욱 변호사 등이 도왔다. 그러나 김오랑 소령의 아내는 1991년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처음에 자살로 발표했다가 유족이 항의하자 실족사로 수정했다.

김오랑 소령은 1990년에야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이 돼서야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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