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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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아버지 다녀오마" 3살 딸과의 약속…펜 대신 총 든 '시인 이육사'

강선애 기자 작성 2024.04.05 12:13 조회 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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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4일 방송된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이무진, 댄서 모니카, 배우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네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뭐야? 가장 오래된 기억 하면, 대부분 대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릴 거야. 하지만 오늘 소개할 분은 좀 특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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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이, 어릴 때 기억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만 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포승줄이 꽁꽁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을 차고 있었어요. 얼굴에는 그 용수, 밀짚으로 된 3단으로 된 용수를 쓰고. 너무나 선명해요.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놀랍고 보지 못한 모습이잖아요. 굉장히 충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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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용수'야. 원래는 술을 거를 때 쓰는 도구인데, 죄수의 얼굴을 가릴 때도 씌웠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가 만 3살도 안 됐을 때야. 하지만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모습을 하셨던 걸까? 할머니의 기억 속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때는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어. 이날은, 할머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야. 아기는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 먼저 태어난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든. 그 후에 얻은 자식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삼촌들이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나서. 그러자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어. "내 딸 이름을 왜 너희들이 짓냐! 다들 나서지 마라"고. 그리고 생후 100일이 되는 날, 아버지는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공개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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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 아버지는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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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날 아침에 말씀하시기를 '기름질 옥'자에 '아닐 비'자다. 이렇게 고심을 하셔서 지으셨대요. 보통 한문으로 '기름질 옥'자, 이거는 잘 안 쓰거든요. '아닐 비'자는 더욱 안 쓰죠. '기름지지 않다' 이런 뜻이잖아요.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 또 간디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이름을 지어주셨대요."
-이옥비 할머니

옥비 아버지는 안동의 유서 깊은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어. 아주 유명한 분의 후손이야.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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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야. 옥비 아버지는 여섯 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시와 서화에 능했대. 옥비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대. 한번 결심을 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다고 해.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 언니들도 삼촌들도 둘째 형님을 굉장히 두려워했대요. 야단을 치지도 않고. 그런데 무언중에 그 매서움이 느껴졌던가 봐요."
-이옥비 여사

하지만 옥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였어. 아침마다 어린 옥비를 안고 놀아주셨대.

옥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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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카고, 저의 큰아버님이 신석초 시인이십니다. 우리 큰아버지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같이 하면서 한시도 보고, 한문 번역 책들 번역도 하고. 그런 점들이 (옥비 아버지와) 다 맞는단 말이에요, 다 똑같아. 서로 도와줬다는 그런 면들이 형제 같은 거 아니겠나. 서로들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신홍순, 신석초 시인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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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순 씨의 큰아버지는 한국 현대 시의 거장, 신석초 시인이야. 옥비 아버지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어. 둘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해. 신석초 시인이 옥비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 있어.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두렷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란 표현은 그와 같은 용모를 말함이리라.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한 점 티끌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제 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돼? 부드럽고 깔끔한 신사 이미지. 상상한 그 모습이 맞는지, 옥비 아버지의 실제 모습을 공개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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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초 시인의 설명 그대로야.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대. 옥비 아버지의 이름은 이원록.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따로 있어. 장담하는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꽃', 그리고 '청포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 옥비의 아버지이자, 신석초 시인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는 바로, 시인 이육사 야.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야. 이육사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고 불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시를 썼어.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당당하게 드러냈어. 저항시인이란 말이 잘 어울려. 이육사 시인은 조금 달라. 한 손에는 펜, 또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투사였어. 평생 17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초인과 같은 삶을 사신 분이야.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이육사라는 이름이 다르게, 그리고 좀 더 무겁게 느껴질 거야.

▲ 시인 이육사

이육사를 대표하는 시 '청포도' 알지?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시야.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석초와 만난 이후부터라고 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3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석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육사를 처음 만났어. 석초의 나이 스물여섯, 육사는 서른하나였어. 나이 차이가 있지만 금방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대.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게 돼. 하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지면을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두 사람이 직접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서로가 쓴 시를 봐주고 고심해 가며 골라서 잡지에 실었어. 신석초 시인은 "만약 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렇게 두 시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야.

두 사람은 글 친구이자 술친구이기도 했어. 육사는 주량이 엄청났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꼭두새벽부터 해장술을 마시는데 끄떡없었대. 술을 마실 땐 떠들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대. 석초는 "육사는 조용히 말술을 마시는 시인이었다"라고 표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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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여행도 다녔어. 천년고도 경주를 함께 여행했어. 석초는 육사와 함께 한 날들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해.

그런데,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절대 건드리지 않는 비밀이 있었어.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실 때야. 육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그러더니 "내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 마시고들 있게"라며 나가. 어딜 가는지, 무슨 일 때문인지, 누굴 만나는지도 얘기하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다는 시간은 어기질 않았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어. 친구로서 서운할 수도 있지만, 석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육사가 말하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굳이 친구의 비밀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두 사람에게 이별의 순간이 오고 말아.

1943년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큰 눈이 내렸어. 아침 일찍 육사가 석초를 찾아와.

"이보게. 석초. 우리 눈 밟으러 가세."

그렇게 나선 산책길. 말없이 걷던 육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내. 신석초 시인이 그날의 기억을 적은 글이 있어.

"조금 뒤에 우리는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銀) 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갔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사(龍蛇)로 늘어지고 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 반짝이고 파릇파릇한 햇싹이 금방 돋아날 것만 같았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 하네' 하고 육사는 문득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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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가 중국으로 떠난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석초는 걱정부터 앞서. 1943년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거든. 일본이 총력전을 펼칠 때였어. 이런 시기에 북경에 간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석초는 질문을 던지거나 걱정을 털어놓는 대신 가만히 육사의 눈을 쳐다봐.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고 맑은 눈이야. 육사가 말해.

"다음에도 같이 눈을 밟으러 가세."

그 약속을 남기고 육사는 떠났어.

이후, 육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어. 석초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술과 잔을 준비해 놓고 육사를 기다렸어. 그런데 육사가 오질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려. 육사의 동생이었어.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어.

"형님이 일본 형사에게 끌려갔소."

석초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더 이상 술잔을 들지 못했다고 해.

여기까지가 친구 육사에 대한 신석초 시인의 기억이야. 얼마 후 육사는 어린 옥비가 보는 앞에서 용수를 쓰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고 해. 육사는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걸까? 그 답은 석초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과 관련이 있어.

▲ 독립투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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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의 비밀이 시작된 건, 오래전부터야. 1919년 봄.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어. 3.1절 만세운동이야.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외침이었어.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 해외까지 들불처럼 번져. 시위 횟수만 해도 약 1700 차례였다고 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력 앞에 쓰러지고 모진 고문과 핍박에 쓰러졌어.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폭력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 무력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열투쟁'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 거야.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어.

그해 가을, 새로 부임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내려. 그가 마차로 옮겨 타려는 순간, 누군가 폭탄을 던졌어. 세 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이토 총독은 무사했어. 그런데 이 폭탄을 던진 인물의 정체가 완전 예상 밖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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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이름은 강우규 의사. 한약방을 운영하던 만 64세의 노인이었어. 환갑이 훌쩍 넘은 노인이 이런 일을 했다고? 아무도 상상을 못 했어. 일제는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해. 강우규 의사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그가 던진 폭탄은 청년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어. 이 의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열투쟁이 시작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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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열세 명의 청년이 한자리에 모여. 이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의열단'이라고 칭하게 돼. 의열단은 김원봉을 단장으로 삼고,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파괴 등 의열투쟁을 시작해. 전에 '꼬꼬무'에서 소개했던 김상옥 의사, 기억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쌍권총을 들고 홀로 천 명의 경찰과 맞선 인물. 총알이 떨어지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 김상옥 의사. 그도 의열단 출신이야.

이렇게 의열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그때, 청년 이육사는 뭘 하고 있었을까?

1924년 초, 스무 살이 된 육사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도쿄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거야. 일본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몇 개월 전 일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거든. 바로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규모 7.9 이상의 대지진이 관동지방을 뒤흔들었어. 가옥들이 무너지고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어. 심지어 태풍까지 불어닥쳐서 피해는 더욱 커졌어.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이상한 소문이 퍼져. 일본 내무성도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를 내려. 사회적 동요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칼끝을 조선인에게 돌린 거야. 그러자 일본인들의 분노는 조선인들을 향하게 돼. 자경단이 조직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됐어. 처참한 학살이 벌어졌어. 공식적인 사망자만 무려 6,661명. 실제 사망자는 그 이상 얼마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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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육사가 일본 도쿄에 간 거야.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며 육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다음 해 1월, 육사는 귀국선에 올라. 그리고 친형제들과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해. 이때부터 육사의 독립투쟁이 시작돼.

▲ 투사 이육사

이때부터 육사는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비밀스러운 행보를 이어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련이 닥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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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18일. 대구에 있는 조선은행.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은행이야. 오전 11시 50분, 은행 앞으로 누군가 자전거를 몰고 와. 그리고는 싣고 온 나무상자 중 하나를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갔어. 은행 지점장 앞으로 온 선물이라며 건넨 상자. 그 안에는 꿀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어. 은행원이 상자를 받아 드는데, 뭔가 타는 냄새가 나. 상자를 열자 꿀 항아리와 타들어 가는 도화선이 보여. 꿀 항아리로 가장한 폭탄이였어. 은행원은 황급히 도화선을 잘라냈어. 일단 폭발은 막아낸 거야. 누군가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조선은행 대구 지점장을 노린 걸로 보여.

신고를 받은 대구경찰서에서 일제 경찰 수백 명이 곧바로 출동해. 사라진 배달부를 쫓고 은행 주변에 경계망을 펼쳐. 그때, 한 경찰이 뭔가를 가리켜. 은행 정문 앞에 서 있던 자전거야. 그 뒤에는 '꿀'이라고 적힌 상자가 세 개 실려있어. 지점장에게 배달된 나무상자와 똑같아. 상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간 순간, 쾅!!!! 자전거 뒤에 있던 상자들이 일제히 폭발해. 대구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었다고 해.

일제 경찰은 의심 가는 용의자들을 잡아들여. 그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이 끼여 있었어. '이원록', 바로 이육사야. 육사뿐만 아니라 형제들까지 체포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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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데도 호외가 막 나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어른들이 걱정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니까 조선은행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고. 꿀단지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그 글이 누가 썼는지 삼촌 글씨와 똑같았대요. 우리 집안 어른들이 4형제가 다 붙들려 간 거잖아요. 우린 항상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일단 먼저 구속시키고 보는 거예요."
-이옥비, 이육사의 딸

육사와 형제들은 이 의거와 관련이 없었어. 근데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경찰은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육사와 형제들에게는 거짓 혐의를 씌운 거야. 중국에 갔다가 막 돌아온 육사에게는 폭탄을 밀수한 혐의를 씌우고, 폭탄 상자에 적힌 글씨가 동생 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며 억지를 부렸어. 범행을 인정하라며 가혹한 고문과 매질이 가해져. 하지만 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대. 그렇게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육사는 석방돼. 그런데 그를 풀어준 이유가 기가 막혀.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

아무런 혐의점이 없대. 아무런 증거도 없이 1년 7개월 동안 붙잡아놓고 고문한 거야. 참 어이가 없지.

이런 일을 겪고도 육사는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해. 그리고 이때부터 이름을 바꿔. 본명 이원록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이육사로. 일제가 붙여준 수인번호 '264'를 본인의 이름으로 삼은 거야. 더 당당하겠다는 다짐, 이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의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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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옥고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육사는 또다시 잡혀들어가. 광주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어. 이 사건이 전국으로 번질까 봐 일제는 요시찰인물들을 또다시 잡아들인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미리 붙잡아둔 거지.

"늘 무슨 일만 딴데서 터져도 아버지는 항상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들어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피습하는 거죠."
-이옥비, 이육사 딸

열흘 후에 풀려난 육사는 이듬해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대구 시내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뿌려졌거든. 육사는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서 또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어. 이때 받은 고문이 가장 혹독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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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있잖아요. 삐쭉삐쭉 잘라놓은걸, (다리 사이로 끼워서) 꿇어앉혀 놓고 훑으면 살이 다 떨어지잖아요. 나쁜 짓은 다 했지. 일본 사람들이."
-이옥비, 이육사 딸

물고문에 전기 고문까지. 옥비 어머니는 매주 새옷을 형무소에 넣어드렸어. 그러면 육사가 입던 옷을 내주는데 흰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해. 옥고를 치를수록 육사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 못할 정도였대. 하지만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어. 그 무렵 육사의 모습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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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발견된 육사의 사진이야. 한창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20대 시절의 모습이야. 눈빛에서 강한 결의가 느껴져.

▲ 펜 대신 총을 든 이육사

1932년 봄, 육사가 갑자기 사라져. 일본 경찰은 육사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바로 수배령을 내려. 육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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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는 만주로 가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천진과 북경을 거쳐 그해 가을, 남경에 도착해. 이곳에 온 목적은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때문이야.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기관이야. 사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지속해 온 의열투쟁의 한계를 느꼈어. 일제에 저항하는데 소수의 의거가 아니라, 이제는 대규모 부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거야. 그러려면 병사들과 이들을 이끌 지휘관이 필요해. 이 군사학교는 병사들을 지휘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야. 육사는 이곳에 1기생으로 입교해. 그리고 최고의 지휘관이 위한 군사훈련을 받아. 당시 일과표를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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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여섯 시 기상해서 오전에는 군사학과 정치학 수업을 들어. 전쟁에서는 전략과 머리싸움도 중요하니까. 오후에는 고된 야외훈련을 받아야 해. 사격 훈련, 폭탄 제조, 암살 등의 비밀공작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야. 밤에는 중국어 수업과 토론수업이 있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중국어를 써야 했거든. 밤 11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스케줄. 선비 집안에서 자란 육사가, 훈련을 잘 해냈을까?

"이정기(독립운동가)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일뿐더러 말을 타고 달릴 때도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 권총을 여섯 자루가 왔는데 밤에 호롱불을 꺼 놓고도 다 해체해서 조립하는 그런 걸 아주 정확하게 해냈다고. 변장술도 능했고, '육사는 언어의 마술사다' 중국어, 일어, 에스페란토어도 배우셨더라고요."
-이옥비, 이육사 딸

펜이 아니라 총을 쥐고, 깔끔한 양복 대신 거친 군복을 입은 육사의 모습. 어때, 상상이 돼?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각자 임무를 부여받고 흩어졌어. 육사에게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의열단을 위해 사력을 다하라"는 임무가 부여됐어. 그렇게 육사는 경성으로 잠입했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은 거야. 그런데 채 뜻을 펴기도 전에 육사는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정보가 샜던 거야. 1기 졸업생들이 여기저기서 검거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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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육사의 모습이야.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이 마음 아프지?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난 후, 육사는 일생의 지기를 만나게 돼. 그게 바로, 1935년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만난 신석초 시인이야. 처음에 만났을 때 아름다운 문인으로서 대했지만, 육사는 이미 그 전에, 이 모든 과정을 겪었던 거야. '시인'이기 전에 '투사'였어. 하지만 육사는 석초에게 자신의 임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해를 입을까 봐, 그걸 걱정했던 게 아닐까 싶어. 두 사람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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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가 중국에 갔다 왔던가. 어느 추운 날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추운데 외투도 안 입고. 추워 보이고 막 그렇게 실제 추워하고 그래서 (큰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줬다고. 우리 어머니가 어디서 잃어버리고 오신 줄 알고 '아이고 왜 외투는 안 입고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서 그러니까. '육사가 너무 추워 보이고 불쌍해서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내가 그냥 윗도리를 벗어줬다'.."
-신홍순, 신석초 조카

이번에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석초. 석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육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석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석초와 만난 후 육사는 강렬한 시들을 써냈어. 그리고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어.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시 또한, 그가 현실에 맞서는 방법이었어. 이뿐만이 아니야. 육사는 자신이 쓴 시를 직접 해석한 적도 있어.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해석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 맨 처음 읽었던 '청포도' 기억나지? 그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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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

육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아. 일본의 패망,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박차를 가해. 내선일체, 신사참배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에 동화시킨다는 거야.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최악의 시기가 닥쳐왔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해. 우리 말과 글을 쓸 수도 없어. 글을 빼앗긴 문인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을 선택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같은 민족문학의 거두들마저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어.

암담하기만 한 그 시기, 육사는 이런 시를 썼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갔을 때를 회상하며 쓴 것 같아. 이 시의 제목은 '절정'이야. 육사는 이 시기를 절정이라 생각했나 봐. 이때만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무렵, 육사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와. 사랑스러운 딸, 옥비가 태어난 거야. 일찍이 1남 1녀를 홍역으로 잃었던 육사였어. 어렵게 얻은 딸인 만큼 얼마나 예뻤겠어. 독립운동 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했지만, 집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옥비를 안고 놀아주곤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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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는 다 글을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낙관이 많았대요. 그래서 이렇게 펼쳐놓고 아버지가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라'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내면 맞으니까, 아버지가 그게 재미있어서 집에 계실 때는 아침에 저를 불러놓고 그런 걸 좀 자주 했고…"
-이옥비, 이육사 딸

생각만 해도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하지만 육사에게는 가족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어. 바로 조국의 독립. 어린 딸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가야 했어. 떠나기 전에 육사는 옥비를 데리고 어딘가를 갔어. 당시 종로에 있던 조선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었어. 옥비를 두고 떠나는 게 미안해서였을까. 여기서 딸을 위한 선물을 사. 핑크색 모자와 벨벳 투피스, 그리고 까만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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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형편이 굉장히 어려운 형편이었거든요. 화신백화점에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랑 출타할 때는 꼭 그 옷을 입으면 아이들이 그게 예쁘다고 '한 번만 벗어봐라 입어보자' 막 그랬던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옷이잖아요. 마지막 선물이었죠."
-이옥비 여사, 이육사 딸

그리고 육사는 친구 석초를 찾아가 함께 눈을 밟으며 작별인사를 건네. 그렇게 북경으로 위험한 여정을 떠났던 거야. 딸과 친구를 두고 떠나는 육사의 마음, 상상이 되니?

북경에 도착한 육사는 한 사람을 찾아가. 육사의 먼 친척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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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오실 때마다 오고 삼촌들도 이제 우리 집에 일가니까 다. 그러니까 찾아오시고 했는데, 하루는 육사가 날 찾아왔데. 찾아와서 '병희야. 나가자' 그래. '예. 나갑시다'. 그리고서는 '중경에서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너 갈래?' 그러데. '가죠' 그래서 '너 안내원도 왔다. 너 데리고 갈' 그래서 '널 연안으로 보내기로 했다."
-故 이병희 생전 인터뷰 中

중경에는 당시 임시정부가 있었어. 연안에는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가 있었다고 해. 육사는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 사이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은 걸로 보여.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긴 거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큰형의 첫 번째 제사가 다가오고 있었거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터라 이젠 육사가 집안의 어른이야. 동생들한테만 맡겨놓을 순 없잖아. 하지만 막상 조선에 돌아가자니 아주 위험해.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럼 육사는 어떻게 했을까?

1943년 7월. 육사는 고향마을로 돌아갔어. 어머니와 형의 제사를 치른 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어. 그리고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어.

▲ 육사의 마지막 외침

20일간 조사를 받은 육사는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돼. 손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얼굴에는 밀짚으로 엮은 용수가 씌워져. 육사가 북경으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옥비 어머니는 어린 옥비를 안고 기다렸어. 저만치 용수로 얼굴을 가린 남편이 보이자 어린 옥비를 높이 쳐들어. 가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그러자 육사가 걸음을 멈춰. 어린 옥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더니 작별 인사를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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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녀오마."

그렇게 육사는 기차에 실려 북경으로 압송됐어.

"아버지가 기차를 타면 떠나시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얘기하고 곧 오실 것처럼, '곧 다녀오마' 그런 거는 아무리 위급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이었죠."
-이옥비, 이육사 딸

그날 이후 육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바로 북경에 남아있던 육사의 친척이자 독립운동가 병희.

병희는 걱정이 태산이었어. 육사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났는데 안 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 그러던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병희를 찾아와. "나하고 가서 얘기 좀 하자"며 병희를 잡아끌어. 그렇게 형사를 따라나선 병희는 지하감옥에 갇히고 말아. 그리고 그곳에서 육사를 만나. 그 순간 '이제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대. 그 후 두 사람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어.

그런데 얼마 후, 병희는 풀려나게 돼. 알고 보니, 육사가 자신이 보증한다며, 병희는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으니 풀어달라 한 거야. 육사의 보증으로 병희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육사는 차가운 지하감옥에 남았어.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야. 육사는 잡혀 올 때 그대로 여름옷 차림이었대. 방에서는 연신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고 해. 병희가 풀려난지 닷새쯤 지났을 때, 형무소에서 연락이 왔어.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시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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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찾아왔더라고. 찾아와서 육사가 죽었는데, 오늘 새벽 5시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너밖에는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시체를 찾아가라 그러대."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북경 지하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어. 그의 나이 마흔 살.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가혹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거야.

그날 저녁, 병희는 형무소를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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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들어가니까 육사가, 시체가 관에 있데. 그런데 관뚜껑을 딱 여니까 얼굴이 그냥 빨개지면서 코에서 피가 막 주르륵 나면서 눈을 뜨고 죽었더라고. 뒤처리는 내가 다 할 테니까 안심하고 곱게 가시라고. 그리고 (눈을) 쓰다듬으니까 다시 얼굴이 하얘지면서 죽은 사람으로 변하고 눈을 감더라고."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아무 걱정 마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가시오"라고 말하며 육사의 부릅뜬 눈을 세 번 쓰다듬자 그제야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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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전보가 날아왔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가 방 하나를 달라고 그래서 머리를 풀고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엄마가 우니까 나도 따라서 정확하게도 모르는데 울었죠. 같이 울고…"

-이옥비, 이육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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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희는 육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남긴 유품을 챙겼어. 유품이라 해봐야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조각뿐이었어. 그 마분지에는 육사가 남긴 시가 쓰여 있었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는 시를 쓸지언정 유언을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 말처럼 유언 대신 시를 남기고 가신 거야. '광야',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시인데, 다른 느낌이지? 이 시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육사의 이야기,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있어.

▲ 그가 세상에 남긴 것

육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해. 모두가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어. 그리고 육사가 순국한 지 2년 후인 1946년. 그의 첫 시집이 세상에 나와. 육사의 동생이 형이 남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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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초를 비롯한 육사의 친구들이 서문을 적었어.

"육사가 북경 옥사에서 영면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 온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스무여 편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시가 세상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타까이 공중에 그린 무형한 꿈이 형태와 의상을 갖추기엔 고인의 목숨이 너무 짧았다."

신석초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사시다가 1975년,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어. 조카 신홍순 씨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어. 생전에 육사가 큰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잦은 고문 때문에 폐병을 얻었던 육사가 요양차 내려간 경주에서 보낸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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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초 형! 내가 모든 의례와 형식을 떠나 먼저 붓을 들어 투병의 일단을 호소함은 얼마나 나의 생활이 고독한가를 형이 짐작하여 줄 줄 생각한다. 석초 형! 나는 지금 이 넓다는 천지에 진실로 내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 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그래서 군(君)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 하여주리라고 바라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강하고 엄격한 육사가, 외롭다고 투정도 부리면서 왜 먼저 편지를 쓰지 않냐고 점잖게 보채기도 하지. 인간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보일 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웠던 거 같아.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못다 나눈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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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따뜻하게 그분들이 지냈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하늘에서 만나셨겠지? 그래서 두 분이 역시 가깝게 시를 왔다 갔다 하고 쓰고 계실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홍순, 신석초의 조카

그리고 이옥비 할머니는,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처럼 여전히 욕심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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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쓰신 시가 좋다고 그러지만은, 내게는 지게꾼이라도 어깨를 두들기면서 '얘야 밥 먹자' 이렇게 다독거려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철이 없어서 그랬죠. 그때는... 그렇지만 이제는 저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제 이름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욕심 없는 그런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조금 모자란 듯하게 사는 게 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옥비, 이육사 딸

아까 이육사라는 이름이 수인번호를 따서 만들었다고 했잖아. '二六四'라는 한자를 쓰지. 그런데 다른 한자를 쓰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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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육' '역사 사',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이야. 일제 치하의 그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집안 어른들은 이걸 보고 염려를 드러냈대. 괜히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육사는 한 글자를 바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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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육'으로.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사의 한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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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조금 특이한 한자를 쓰신 적이 있어. '고기 육, 설사할 사'로. 뜻만 직역하면,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거야. 이게 일제 치하의 세상을 조롱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어.

그런데 이런 의미로도 해석돼. 딸에게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의미로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비슷한 의미로, '평생 편안하고 기름진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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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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