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탕’ 이세은 “지금은 배우로서 변명이 통하지 않을 나이”(인터뷰)

최종편집 : 2012-08-21 09:34:39

조회수 : 4638

‘허탕’ 이세은 “지금은 배우로서 변명이 통하지 않을 나이”(인터뷰)  기본이미지

이미지

[SBS E! 연예뉴스 l 강경윤 기자] 연극 '허탕'의 주연 이세은(32)을 만나러 대학로로 향하던 길에 기상청 예보에도 없던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스팔트를 불판처럼 만든 한 여름의 더위를 씻어낸 소나기를 행인들은 기꺼이 반갑게 맞았다. 1999년 MBC 공채탤런트로 연예계 데뷔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던 이세은이 불현듯 연극에 도전한 것 역시 소나기처럼 반갑다. 13년 차 이세은이 연극과 사랑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세은이 임신한 여죄수3 역을 맡은 연극 '허탕'은 장진 감독의 작품이다. 이세은에겐 2번째로 도전하는 연극이며, 장진감독에겐 3번째 작품이다. 장진감독과 이세은에게 모두에게 '허탕'이 갖는 의미는 매우 깊다. '허탕'은 장진 감독이 군복무 시절 극본을 쓴 뒤 1995년 처음 무대에 올린 작품이었고, 배우를 지망하던 이세은의 눈을 반짝이게 한 꿈이었다.

“13년 전 '허탕'을 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그 때 장진 감독님께 사인도 받았었죠. 이후 여배우와 감독 사이로 가끔 식사하며 작품 얘기를 나누는 친분을 유지하다가 '허탕'이 13년 만에 재연되는 걸 알고 감독님께 '꼭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감독님도 제 눈빛이 좋다고 하셨어요. 감독님이 무대에선 무서우신 분인데 칭찬을 해주시니 정말 좋더라고요.”

이미지

◆ “좁은 무대를 향한 눈빛들…어렵지만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

'허탕'은 5개의 캠코더 10여개의 모니터가 설치된 오각형의 무대로 7성급 감옥을 형상화한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죄수들의 감시자가 된 것도 모자라, 모니터로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이세은을 비롯한 죄수들은 관객들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의 압박을 받으며 연기해야 한다. 많아야 카메라 2~3대를 두고 연기했던 이세은은 이런 분위기가 부담스럽진 않을까.

“집중력이 정말 많이 필요했어요. 배우 입장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였더라도 관객들이 이를 눈치 챘다면 더 이상 감정의 공유가 불가능해지거든요.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노래를 들으면서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공연한 지 2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대본을 손에서 뗄 수가 없어요. 이것 보세요. 너덜너덜해졌죠?”

이세은이 살짝 공개한 대본의 맨 첫장은 누렇게 빛이 바라고 페이지 끝이 다 헤졌을 정도로 낡아있었다. 또 이세은이 등장하는 중반 이후부터는 대사 한 줄 한 줄에 그녀가 연필로 써넣은 메모들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연극이라는 무대를 얼마나 고민하며 임하고 있는지 그 진지함이 여백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

이미지

◆ “어어…어어…아프면 말하고, 난 잘 참으니까” 

이세은이 무대에 등장하면 관객들은 어수선해진다. 고개를 쭉 빼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안고 어린애처럼 우는 그녀에겐 많은 물음표가 붙는다. 이세은 끝까지 알 듯 모를 듯 한 대사로 상처의 깊이만 내보이다가, 극단적인 공포와 폭력 이후 불이 켜지면 이세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는 채 연극은 끝난다. “아프면 말하고, 난 잘 참으니까.”라는 이세은의 대사만 아프게 멤돌 뿐이다.

“'허탕'은 편안하게 웃고 즐기다가 비장하게 끝나는 느낌이잖아요. 10년 전에 봤을 때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관객들이 결말을 두고 다소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는, 악의 없이 살던 3명이 가상의 공간에서 갑자기 불행해지기 때문 아닐까요. 애초에 처량한 현실에 해피엔딩은 없었으니까요. 장진 감독님의 유쾌한 소동극을 기대했다면 그런 비장미가 불편할 순 있겠지만 인생, 행복,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어는 곳보다 안락한 창살 안, 사랑과 행복을 꿈꾸는 감옥, 죄가 없는 죄수들, 너무나 예쁜 죄수와의 사랑…. '허탕' 속 배경과 인물, 관계는 모순의 연속이다. 사랑에 빠진 죄수들이 외치는 “우리 서로 사랑하지 말지어다.”라는 대사는 사랑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연극 속에서 이세은이 가장 감동을 받은 대사이기도 하다.

이미지

◆ “비기너(Beginner)의 변명과 실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나이”

분명 이세은이 '허탕'을 통해 바랐던 게 있을 터였다. 누군가에 의해 기억은 모두 지워졌지만 모성본능을 가진 상처 가득한 여인이란 쉽지 않은 캐릭터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감정의 두 극단을 오가는 연기를 통해 배우로서 보다 풍부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배우로서 고민이 많던 시기가 있었어요. 2010년 즈음 2년 반 정도 공백기가 있었는데, 준비했던 작품마다 무산이 되면서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었어요. 그 시간이 흐르고 복귀를 했는데 나는 무대에서 신인인 것 같은데 이미 내 뒤엔 후배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공연을 시작한 게 서른살 때예요. 이제 변명이 통하지 않는 시기가 온 거죠. 감독님들이 믿어주는 만큼 책임감을 가질 때가 온 거예요. 배우로서의 나를 확장시키고 싶었고 그런 관점에서 연극을 선택하게 됐죠.”

이세은의 대답은 충분히 솔직하고 명쾌했기에 충분히 납득 할 수 있었다. 또 한번의 명쾌한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이세은이었다면, 감옥 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안락이 보전되지 않는 그곳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갈까? “나중에 이룬 것들이 내가 원한 게 아니었을 때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원한다면 그곳에 무엇이 있듯 안주하기 보단 나아가야죠.”

기자와 대화를 나눈 1시간 동안. 말보다는 글을, 연예인보다는 배우가 좋다는 이세은은 연기에 대한 생각을 시원하게 털어놨다. 행여 까다롭거나 새침데기는 아닐까라는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간 채 이세은은 훗날 대학로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일 것을 기약하며 연습실로 향했다. 기분 좋은 의외성, 소나기를 닮은 이세은을 표현하는 가장 명쾌한 수식이었다.